제3화 “쟤 지금 나 몰래 훔쳐본 건가?”
상즈타오는 함께 교내채용으로 들어온 스무 명 남짓의 동기들과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두툼한 계약서 한 부가 놓여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진지하게 내용을 읽고 있었지만, 상즈타오는 곧바로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리고 서명했다.
동작이 너무 빨라서, 얼핏 보면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뭘 그렇게까지 읽어? 여기 들어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상즈타오는 링메이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세계 정상급 광고회사가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이 정도면 이미 엄청 멋진 일이잖아!
량신은 상즈타오가 서명을 끝내고 펜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 아가씨, 회사에 대한 충성심 하나는 정말 대단하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렸다.
옆에서는 비서가 다른 신입들의 계약 관련 질문에 차분하게 답해주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모든 절차가 끝났다.
링메이는 교내채용으로 뽑은 신입들에게 인턴 로테이션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각 부서에서 3개월씩 근무해보고, 어느 한 부서에서 계속 일하기로 결정되면 로테이션을 조기에 종료하는 방식이었다.
상즈타오의 첫 번째 부서는 마케팅부였다.
마케팅부에서 그녀를 데리러 온 사람은 루미(卢米)라는 여자였다.
다리가 길고 허리가 가늘었으며 무척이나 매력적인 여자였다.
상즈타오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다가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수 냄새를 맡았다.
“어디 살아?”
루미가 아무렇지도 않게 물으며, 상즈타오의 희고 반들반들한 다리를 한번 훑어보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하얗지?’
“북오환(北五环)이요.”
“세상에, 진짜 멀다.”
마케팅부는 15층 가장자리에 있었고, 바로 옆에는 기획부가 붙어 있었다.
루미는 상즈타오를 데리고 장링(张岭)에게 가서 인사를 시켰다.
문이 열리자 상즈타오는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오늘 아침 로비에서 봤던, 그 ‘腔调 있는 남자’였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상즈타오를 무심하게 한번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Alex, 상즈타오 왔어요.”
장링은 책상 앞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으며 손을 내밀었다.
“환영해요, 상즈타오.”
그의 열정적인 태도에 상즈타오는 조금 어쩔 줄 몰라 했다.
옆에서 루미가 웃었다.
“첫날이라 아직 적응 안 되지? 우리 Alex 사장님은 원래 이렇게 친절해.”
“안녕하세요.”
“그러지 마요. 우리 회사는 서로 영어 이름으로 불러요.”
장링이 롼니엔을 가리켰다.
“이쪽은 Luke, 기획부 책임자예요.”
“Luke, 안녕하세요.”
상즈타오는 롼니엔을 향해 몸을 돌리고 웃었다.
롼니엔이 다시 고개를 들어 상즈타오를 바라보더니 장링에게 담담하게 물었다.
“Tracy가 합격시킨 그 애?”
장링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즈타오에게 따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대신 루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이 당신 멘토예요. 앞으로 업무는 루미가 배정할 겁니다. 일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루미한테 물어보고, 저한테 물어봐도 돼요. 오늘 점심에는 부서 신입 환영회가 있으니까 동료들이랑 인사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Alex.”
롼니엔은 노트북을 덮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장링에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죠. 현장 볼 때 나한테 연락해요.”
그는 소파를 돌아 걸어 나갔다.
상즈타오는 얼른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길을 비켜주었다.
왜 그런지는 자신도 몰랐다.
조금 무서웠다.
롼니엔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그림자가 잠깐 상즈타오의 몸 위로 드리웠다가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루미는 상즈타오가 긴장한 것을 눈치챘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 여기 온 지 2년 됐는데 나도 저 사람 무서워.”
그리고 웃었다.
“가자. 네 직장생활 첫날을 시작해보자.”
상즈타오는 루미를 따라 회사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링메이의 사무실 전체에는 예술적인 분위기가 가득했다.
사무공간에는 독서실과 캡슐형 휴게공간, 헬스장이 있었고, 탕비실에는 갓 갈아 내린 커피가 준비되어 있었다.
직원 전용 식당까지 있었다.
“링메이의 기업문화는 정말 자유로워. 근무시간도 탄력적이고. 네가 맡은 일만 끝내면 어디서 뒹굴고 있든 아무도 뭐라고 안 해.”
루미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헛기침을 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멘토로서 하는 말이고.”
그러더니 현실을 알려줬다.
“사실 우리는 맨날 야근해. 밤 7~8시에 퇴근하면 빠른 편이야.”
상즈타오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웃는 모습이 꼭 작은 고양이 같아서 유난히 귀여웠다.
루미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이틀 뒤에도 그렇게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두 사람은 회사 구경을 마치고 사무공간 쪽으로 걸어갔다.
루미가 투명한 유리로 된 사무실들이 늘어선 곳을 가리켰다.
“저쪽은 전부 높으신 분들 사무실이야.”
그리고 가장 안쪽 방을 가리켰다.
“저 끝에 있는 방은 꼭 피해 다녀. Luke 사무실이거든.”
“그렇게까지 아이디어를 쥐어짜요?”
상즈타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루미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제발. 우리가 세계 정상급 광고회사잖아. 당연히 아이디어 쥐어짜는 사람은 있어야지.”
“최근 몇 년 동안 네가 중국에서 봤던 우리 회사의 히트작들, 전부 그 사람 팀에서 만든 거야.”
“아……”
상즈타오는 루미를 따라 자신의 자리로 갔다.
그녀의 자리는 꽤 넓었고, 옆자리 동료들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루미의 말로는 며칠 뒤 발표회가 있어서 모두 현장에 나갔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이미 업무용 컴퓨터를 준비해두었다.
데스크톱 한 대와 외근용 노트북 한 대였다.
상즈타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IT 담당자가 컴퓨터를 설치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러고는 사무실 안을 둘러보다가 자연스럽게 롼니엔의 사무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창가에 꼿꼿이 서서 전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몸가짐은 반듯했고, 폴로 셔츠가 몸에 잘 맞았다.
뒷모습만 보이는데도 꽤 ‘腔调’가 있었다.
정면보다 뒷모습이 더 온화해 보였다.
롼니엔은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사무실 유리 너머로 미처 시선을 피하지 못한 상즈타오와 눈이 마주쳤다.
상즈타오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왜 그런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마치 자신이 몰래 쳐다본 게 아니라는 척하며 IT 직원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제 컴퓨터 설치 다 됐나요?”
“다 됐어요. 한번 해보세요.”
상즈타오는 황급히 의자에 앉아 몸을 자리 안쪽으로 바짝 집어넣었다.
그녀가 일부러 롼니엔을 훔쳐본 건 아니었다.
첫 출근이라 모든 게 신기했을 뿐이고, 방금 그의 뒷모습을 몇 초 바라본 게 전부였다.
‘이 정도면 실례인 건가?’
상즈타오는 몸을 조금 더 낮추고 컴퓨터를 켰다.
입사 정보를 등록하고, 회사 네트워크 보안 안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오늘 안에 봐야 할 온라인 필수교육도 두 개나 있었다.
롼니엔은 여자들의 시선에 익숙했다.
그래서 상즈타오가 자신을 바라본 것 자체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 뒤에 보인 행동이 지나치게 찔려 하는 사람처럼 어색해서, 오히려 방금 상즈타오가 자신을 몰래 엿보거나 음흉하게 훔쳐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래?”
전화기 너머의 사람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롼니엔이 대답하고는 다시 물었다.
“부서 신입 환영회 장소 정해졌어요? 주소 보내줘요.”
“네.”
롼니엔은 평소 부서 회식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신입 환영회는 예외였다.
그마저도 본인이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회사에서 의무적으로 참석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Tracy는 그것도 기업문화의 일부라며, 관리자는 회사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일을 마친 롼니엔은 자동차 키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마침 맞은편에서 루미 뒤를 따라오던 그 신입사원이 보였다.
“Luke, 안녕하세요.”
“네.”
롼니엔은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루미 뒤에 서 있는 상즈타오를 힐끗 보았다.
상즈타오는 조금 전의 민망한 일이 떠올라 다시 얼굴이 빨개졌다.
젊은 신입사원.
쉽게 얼굴이 빨개지는 신입사원.
롼니엔은 갑자기 회사에 조금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계속 이러다가는 노동시장에 직원을 도매로 풀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그는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함께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 엘리베이터에 탔다.
넓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 같은 벽면에는 세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쳤다.
루미는 멘토로서의 존재감을 한번 보여주고 싶었는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로 했다.
“어디 가세요?”
베이징 토박이인 그녀의 말투에는 후퉁에서 양꼬치를 먹는 듯한 베이징 특유의 말맛이 묻어났다.
영감이라고 부를 만한 분위기는 별로 없었다.
상즈타오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꼭 다물었다.
“칭옌(清宴).”
“어머, 우연이네요. 저희도 거기 가요.”
루미는 엘리베이터 거울 너머로 롼니엔에게 웃었다.
롼니엔은 이런 의미 없는 인사치레를 싫어해 짧게 대답하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루미의 멘토 체면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는 몰래 롼니엔을 한번 흘겨보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세 사람은 각자 차를 찾으러 갔다.
차에 올라탄 뒤에야 루미가 상즈타오에게 말했다.
“저 사람 원래 저래. 다들 무서워해.”
“그런 것 같아요.”
상즈타오는 손바닥을 펼쳐 루미에게 보여주었다.
“봐요. 식은땀까지 났어요.”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저 사람하고 전에 한번 얘기한 적 있어요. 제 2차 면접관이었어요. 그런데 한마디도 안 했어요.”
“헐, 그럼 그때는 뭘 면접 본 거야?”
상즈타오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둘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자동차 한 대가 바로 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루미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 오빠가 사람 상대하는 건 좀 별로긴 한데……”
그리고 아주 중국어다운 한마디를 덧붙였다.
“人是真他妈像样儿。”
상즈타오는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주석
1. 开绿灯 — 특별히 통과시켜주다
롼니엔이 상즈타오를 보자마자 말합니다.
tracy开绿灯的那个?
开绿灯(kāi lǜdēng)은 직역하면 ‘초록불을 켜주다’지만,
편의를 봐주다 / 특별히 허가하다 / 예외적으로 통과시켜주다
라는 뜻입니다.
롼니엔은 상즈타오를 탈락시켰지만 Tracy, 즉 량신(梁心)의 부탁으로 결과를 바꿨죠.
따라서:
“Tracy가 특별히 통과시켜준 그 애?”
2. 腔调
“뒷모습만 봐도 꽤 멋과 분위기가 있었다.”
단순히 ‘잘생겼다’가 아닙니다.
腔调(qiāngdiào)에는 그 사람만의 스타일, 세련됨, 분위기, 아우라 같은 의미가 섞여 있습니다.
2화에서 상즈타오는 롼니엔을 처음 보고 ‘아, 腔调라는 게 저런 거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같은 표현을 씁니다.
3.像样儿
xiàngyàngr
마지막 문장의 핵심입니다.
人是真他妈像样儿。
여기서 像样儿는 ‘모양이 비슷하다’가 아닙니다.
제대로다 / 훌륭하다 / 괜찮다 / 사람 자체가 꽤 멋지다
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他妈가 들어가서 감탄이 강해집니다.
문맥을 살리면:
“근데 사람이 진짜 존나 멋있긴 해.”
정도의 말맛입니다.
조금 순화하면:
“근데 사람이 진짜 끝내주긴 해.”
루미의 성격을 생각하면 너무 얌전하게 “사람은 정말 괜찮아”라고 번역하면 원문의 맛이 많이 사라집니다.
